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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기록

[책] 열 한 계단을 읽는 중에 (Feat. 성경, 채사장, 붓다)

by 강정파티 2020. 9. 2.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해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도 같은 이유로 꾸짖은 적이 있다. 그들은 모세의 자리를 이어 율법을 가르치면서도 그 행실에 있어서는 위선자다. 그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그들은 기다란 예복을 걸치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찾으며 잔칫집에 가면 제일 윗자리에 앉으려 한다. 또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오래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마르코복음 12:38-40 
-열한계단 74p

나 또한 너무 보여지는 것에만 열중하고 내 안에 있는 것들은 무시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대우받으려고 하지 않고, 내가 해야할 것을 하고, 그 분야에 뛰어난 기량을 드러내 사람들이 인정해주었을 때 비로소 그만한 대우를 받게 되지 않을까.



젊은 나의 생각은 옳았다. 그때 이후로 단 한 번도 완전함 혹은 충만함의 느낌을 가져본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임을 안다 . 왜냐하면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완전함과 충만함이란 아이러니하게도 미숙함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말이다.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할수록 세상은 단순하고 명쾌하게 보인다. 문제는 세상을 그렇게 단순하게 파악할 때만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어른으로 성숙해간다는 것은 세계의 복잡성을 초연하게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세계의 복잡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함과 충만함의 허구성을 이해했음을 의미한다. 완전함과 충만함을 내려놓은 사람에게 행복은 없다.

채사장의 대학시절 몽골여행
-열한계단 102p

20대 초반에 나는 학교를 휴학하고, 우연한 기회로 회사를 다니게 되었다. 비록 인턴이었지만 그 당시 내가 경험하는 것들, 성과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고 기분 좋았다. 안좋게 말하면 뭣모르는 애송이가 조금 치켜세워주니 좋다고 열심히 한 것이고, 좋게 말하면 정말 열심히 몰입해서 재미를 느낄만큼 성취감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땐 무얼하던 그저 다 했고, 그들과 일하는 것 자체가 재미였고, 회사에 어떻게든 기여하고 싶었다. 
하지만 30대 초반이 된 지금은 무엇을 하던지 채워지지않는 목마름이 계속된다. 회사, 프리랜서, 계약직 등 여러 경험들을 거쳐온 지금이라는 결과는 많은 지식과 경험을 얻었다. 그렇기에 더 목이마른 것일까. 무얼 하던 성취라는 말이 떠오르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내가 바라고 있는 수준이 너무 높아서 그런 것일까. 책에서 말하는 완전함과 충만함의 기준을 좀 낮춰야할까도 생각해본다. 



무상과 무아는 세계의 엄밀한 진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우리는 세계와 자아에 집착하게 되고 여기서 고통이 생겨난다. 변화하는 세계에 집착하는 것은 흐르는 강물을 움켜쥐려는 것처럼 슬픔을 낳는다. 세계와 자아의 끝없는 변화를 받아들일 때 집착과 욕망은 사라진다. 윤회의 고리는 끊어지고 우리는 깨달음에 이를 것이다. 붓다는 이를 위해 부지런히 정진할 것을 당부한다. 

붓다의 가르침과 전파
-열한계단 120p

내가 몸담고 있는 업계는 정말 하루아침에 무엇이 바뀔지 알 수 없는 판이다. 작게는 툴이 바뀔 수 있고, 크게는 시장의 방향이 바뀔 수도 있다. 요즘은 전염병 덕에 특히 더 그렇다. 
그렇다보니 변화에 따라가게 되는 것이 몇 년째 계속 되어 일하는 것만으로도 지치는데 끊임없이 치열하게 공부해야한다. 그것을 놓는다는 것은 고인물이 되겠다는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책에서 말하는 "세계와 자아의 끝없는 변화를 받아들일 때 집착과 욕망은 사라진다."라는 구절에서 의미하는 바가 그것과는 결이 다른 말이라는 것은 느낌으로 알 것 같다. 다만 그것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는 지금의 나로서는 아직 알 수 없다.



“자신이 자신의 등불이 되어라. 자신이 자신의 의지처가 되어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처로 삼아라.”
~
“모든 생겨난 존재는 없어지게 되어있다. 부지런히 정진에 힘써라.”
붓다
-열한계단 121p

소위 말하는 대학의 선배, 회사의 사수, 인생의 멘토와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없진 않았지만 무언가 부족했다. 친구들에게도 '그런 사람의 존재가 나에겐 필요하다'라고 말하고 다니기도 했다. 이유는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지지해주고, 옹호해주며, 합리적으로 비판해주는 나의 윗 레벨에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큰 의미의 멘토이다. 
그런데 요즘 이런 책과 요즘 사회가 변화하는 것과 관련한 콘텐츠들을 보며 느끼는 것은 위의 붓다가 한 말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의 등불이 되어라는 말은 그대로 자기 자신을 믿으라는 말이다. 바꿔말하면 자기 자신을 자기가 믿지 않으면 누가 믿느냐는 것이다. 내가 나를 믿고 뭔가를 해야 다른 사람도 비로소 나를 믿어주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멘토라는 존재는 자기 자신을 믿는 단계까지 가는 과정 중에 잠시 촉매제 역할을 해주는 존재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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